스마트폰도 없던 중학교 시절부터 디지털 세계에 눈을 떴던 나는 숙제 내용을 워드프로세서에 옮겨 적곤 했다. 당시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에 와서는 20년 넘게 쌓여온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가끔 생각날 때 옛날 작업물들을 열어보면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볼 필요가 없는 쓸모 없는 내용이지만, 간혹 시간 간극을 뛰어넘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도 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끊임 없이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당장 일 주일 전의 일도 잊어버리고 만다. 자동완성에 기반한 거대 언어모델이 개별 인간의 평균치를 상회하는 2020년대에도 경험을 온전히 기록하는 기술은 요원하다. 한때 외부기억에 의존해서 완전기억을 구현해 보겠답시고 하루 종일 웹캠을 차고 다니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기록해보려고 한 적도 있었고, 대학교 세미나 수업때 들었던 유명 뇌과학자의 강연에서 의식을 재현하기 위한 그 많은 데이터는 어디에 저장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속 시원한 답은 찾지 못한 것 같다.
옛날에는 없었던 수없이 많은 저장 매체들이 발달했음에도, 촉박한 일정과 잦은 수정사항 때문에 유용한 기록을 남기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중요한 내용일수록 뇌리에 오래 남으니 역설적이게도 기록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1960년대에 인류를 달에 보냈던 새턴 5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나의 박사연구도 나름 열심히 기록했다고 생각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기한 속에서 완성도가 부족했는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데이터가 되었다. 나의 뒤를 잇겠다고 따라다니던 후배에게 그간의 연구 노트와 모든 기록 자료들을 넘기고 직접 내부 세미나까지 열어서 내용을 전수해줬지만, 떠나온 지 2년이 되어가는데도 내가 만든 기기를 재현해내지 못했다. 잃어버린 기술이 된 것이다.
기록하는 것은 고된 작업이다. 읽고 쓰는 것이 주 업무가 된 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숨막히는 일이다. 블로그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중에 다시 와서 봐도 좋을 내용들만 남기고 대부분 날려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여유 시간이 없어져서 내용이 체계를 갖추지 못하거나 용두사미가 되는 글들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읽고 도움을 받아 가거나 댓글로 서로 소통도 하는 장이 된 것 같아 나름 보람있을 때도 있다. 많이 쌓이다 보니 통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던 데이터도 볼 수 있게 되고, 그런 데이터에서 영감을 얻어가기도 하는 것 같아서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가끔 남는 시간에 와서 뭐라도 적어 보고는 있는데 여전히 쉽지는 않은 일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본업에 관련된 내용은 술술 적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보안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은 공개 기록으로 남길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몇 만 년 전에 돌에 새겨진 무늬가 현재에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과는 달리, 현대의 전자기적 방식을 이용하는 저장 장치는 몇천 년만 되어도 마이크로 패터닝이 되어있는 대부분의 0과 가끔의 1로 표현되는 의미없는 금속 쪼가리로 남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데이터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백업할 만한 가치를 남기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내 생각의 단편을 디지털로 기록해 오면서 느낀 바는, 먼 미래에 육체가 없더라도 내 사고 흐름을 연장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할 수 있다면 필멸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겠다는 희망이다. 현재의 흔적을 미래로 보내며, 만 년 뒤의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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