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의 여백

바쁜 나날들 사이에서 생각났던 이런저런 것들을 적어봅니다.

일상./생각

기획연재 - 03. 이름 짓기. 익숙하지만 참신한

Eli♪ 2024. 11. 11. 23:58

닉네임을 적으라는 빈 칸을 앞에 두고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찰떡같은 이름이 불현듯 떠오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꽤 많은 시간을 써버리곤 할 것이다. 새로운 시작에는 대개 이름 짓기가 수반되는데, 내용이 길면 안 보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이름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한 때 유행했던 것으로 제목학원이라는 것이 있다. 사진이 주어지고 사진에 가장 적합한 제목을 적는 것을 놀이로 하는 문화로, 대부분은 유행을 타기 때문에 잠깐 반짝했다 사라지지만 몇몇은 잊혀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된다. 나중에는 제목만 봐도 사진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기억의 궁전은 기억술의 한 갈래이다. 연관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사물도 어떻게든 연결지어 연상하는 방식으로 기억력을 증강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익숙해지면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기억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대다수가 공감할 수 없는 연상법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름을 잘못 짓는 경우 잊혀지는 건 한순간이다.
 
1인 미디어가 흥하면서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실명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보통은 새로운 별명을 부여하게 된다. 관련해서 조금만 찾아 보아도 어떤 전략으로 이름을 지을 것인지 소개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힘을 주고 의미부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름 짓다가 정작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주객전도의 상황도 종종 일어나게 된다.
 
파이썬은 딥러닝 시대에 가장 유명한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이다. 알고 보면 대충 TV 프로그램 이름 중 일부를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됐건, 약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대충 지은 이름이 해당 분야의 대표성을 띄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이름을 막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이런 사례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이 블로그 이름만 해도 모 영화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으니 말이다. 블로그 이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엔비디아라는 기업명은 반도체나 인공지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봤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이름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드물다. 뜯어 보면 나름의 의미와 철학을 담았다고는 하지만 정작 다수는 그런 것에 별 관심도 없고,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만 철자나 발음을 틀리든 말든 실체는 있기 때문에 사람은 올바르게 기억하지 못해도 인류를 백업하고 있는 기계는 기억하지 않을까.
 
초코파이라는 이름은 오리온에서 만들었지만 너무 널리 퍼져버린 나머지 상표의 특성을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현재에는 대충 작고 동그란 빵에 마시멜로가 들어있고 초콜렛이 둘러진 과자면 초코파이라고 광고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경우 이름은 남지만 정작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이름을 통해 기억되기를 바랐던 회사-상표명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느슨해져 버렸다. 너무 익숙한 이름을 지어도 탈이다.
 
이름을 오래 유지하다 보면 역사가 쌓인다. 앞선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의미 없이 지은 이름이나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름도 시간이 축적되다 보면 축약된 이름만 가지고도 펼쳐 보일 수 있는 내용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름을 바꾸는 경우에는 그 동안 쌓아온 인지도를 뒤로 하고 새로이 출발해야 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있고, 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늘어나는 이유는 익숙함 속에서 참신함을 찾고 더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라는 발버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