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과시네요
대학원 시절, 후배에게 들었던 말이다. 자기도 공대 대학원생이면서 나보고 이과라고 하는 건 감정을 배제한 판단을 칭찬하는 것인가,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점을 돌려 까는 것인가. 요즘 말로 하면 "T발 씨야?"에 해당하는 듯한데, 어쨌거나 각종 현상에 대해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성향인 것은 맞는 듯하다. 평소에 복잡한 개념을 간단하게 축약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기나긴 대학원 생활 동안 연구활동을 하면서 쌓은 개념을 한 줄로 표현하면 이 글의 제목과 같이 가설-실험-검증-공유이다. 그리고 이 문구는 현재 매일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잠금 화면에 적혀 있다.
사실 이 절차는 학술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할 것이다. 확인하고 싶은 이론이 있다면 적당한 가정을 한 뒤에, 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해 보고, 예상이 맞았는지 검증해 보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하는 것이다. 학술 연구라면 결과물은 논문이 될 것이고, 꼭 연구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실험만 가능하다면 말이다.
소프트웨어는 최첨단인데 하드웨어가 못 따라가
지난 15년 간 여러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들은 말을 요약한 것이다. 그들 중 다수가 대학 교수가 되었을 정도로 탁월한 사람들이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해석해 보면 생각은 제대로 했는데 실행력이 애매하다는 뜻일 것이다. 일상에서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서 끊임 없이 사고 실험을 돌리는데 보통 생각의 우물을 납득이 될 때까지 파 버려서 남들이 보기엔 깊이가 있어보이는 것 같다. 다만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이 대충 맞았다 판단이 되면 굳이 현실에서 구현하지 않고 다음 절차로 넘어가버려서 정작 보여주려고 하면 실물이 없는 상황을 종종 만났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잘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서 그게 진짜 돼? 이다.
하필 학위 과정 동안 했던 연구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되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어서 이 약점을 반강제로 보완해야 했고, 여러 고통의 과정이 있었지만 어찌저찌 학위를 마무리할 수는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시뮬레이션이나 프로그래밍 등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서는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깊이와 너비를 갖춘 결과물이 나오는데, 실물 구현에 있어서는 아직도 자신 있는 편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로 그 실물 구현 부분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가설-실험-검증-공유라는 절차를 생각 속에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끌고 오는 능력이 앞으로도 보완해 나가야 할 부분인 것 같다.
내가 못할 게 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돌파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는 문장이다. 심리학 용어로는 내적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든 이후에 나온 결과물은 남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보통 만족스러웠던 같다. 이 블로그에도 몇몇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뽑기 확률 계산기를 만든 일이나, 논문용 그림 그리는 법에 대한 정리, 마이크 설정법에 관한 정리, 게임 가이드 제작 등 다양하다. 반면 그 동안 경험상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막히는 상황이 왔을 때 "그렇게까지 해야 돼?" 라는 질문을 던지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을 많이 봐 왔다. 무의식적으로 능력에 상한을 정해 놓게 되는 셈인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내가 못할 게 뭔데? 라는 문장도 좋지만 뭔가 와 닿는 부분이 없어서 항상 마음 한구석에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하고 오랜 기간 생각했었는데, 몇 개월 전에 우연히 발견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창업자 인터뷰에서 why not? 이라고 하는 걸 보고 느낌이 팍 왔다. 그래서 평소에 정보 저장해두는 개인 디스코드 채널에도 적어 두었고 기존에 스마트폰 잠금 화면에 적어 두었던 내용 뒤에 이 문장을 붙였다. 그제서야 완성된 느낌이 들었고, 그렇게 해서 가설-실험-검증-공유. Why not?이 되었다.
사실 이 글도 바로 직전 글에서 통렬한 반성을 거치고 내가 못할 게 뭔데?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결과물이고, 다 써놓고 드는 생각은 마음에 든다이다. 최근 새로운 도전을 해본답시고 괜히 성향에도 안 맞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했었는데, 역시 나에게는 이런 류의 글이 더 잘 맞고 더 술술 써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약 2주간 더 매일 뭔가를 써내려갈 텐데, 지금과 같은 느낌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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