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일요일 밤, 평화로운 주말에 폰이 지이잉 하고 울렸다. 이메일이었고, 제목은 뭔가 업무관련인듯했으나 다음 날이 월요일이니 내일 처리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집안일 등 여러 본업 외적인 일들을 먼저 끝내고 잊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메일 앱을 열어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교수들끼리 이메일이 수 차례 오갔고, 이미 내가 그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있었고, 관련 내부회의가 월요일 아침에 잡혀 있는 것이었다. 아. 준비 안했는데 어떡하지.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사무실 자리에 앉으니 5년짜리 정부에서 주관하는 프로젝트 (보통 정부과제라고 부른다) 의 킥오프 미팅을 위한 자료준비가 필요한 거였고, 아예 처음 보는 주제라 급하게 GPT나 Gemini 등 언어모델으로 큰 개념을 잡고, 근거자료는 구글 scholar 등등을 뒤져서 비스무리한 논문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니 이미 회의 15분 전이라 급하게 찾았던 내용을 회의에 같이 들어오라고 한 석사과정에게 브리핑한 후, 심호흡 하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들고간 자료가 운이 좋게도 의미있는 자료라 회의는 잘 마무리되었고, 보통 회의를 하면 일이 생기기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는거야 그러려니 했는데, 새로 생긴 일은 무려 기한이 당일, 그것도 최대한 빨리였다.
원래 계획했던 업무가 있어서 그거 다 처리하고 나서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일단 미뤄두고 급한거 쳐내고 있는데, 갑자기 총괄방, 세부방, 교수있는방, 교수없는방 등 몇몇개의 카톡방에 끌려갔다는 알림이 오면서 타 그룹 총괄실무자에 의해 실시간 공지가 시작되었다. 내용인즉슨 급하니까 당일 밤에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결국 당일 밤 무려 열 몇 명의 교수를 포함한 사람들이 밤 10시에 모이는 화상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내용은 학교, 병원, 회사, 해외자문까지 낀 매우 큰 프로젝트였고, 제목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상태에서 2주 뒤에 계획서와 함께 발표심사를 받아야 하는 초 긴급 일정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하루가 멀다하고 당일이 due인 일들이 쏟아졌고, 카톡 알람은 계속 울렸다. 아무리 봐도 기밀에 해당하는 자료들이 거리낌 없이 카톡을 통해 날아왔고, 공문서들과 개인정보를 포함한 문서들이 난무했다. 평소에 보안 이슈때문에 업무로 카톡 쓰는걸 매우 싫어하는데 그야말로 분단위 날벼락이 쏟아지는 경험이었다. 내 주관에 따라 지시는 카톡으로 왔더라도 답변은 이메일로 쓰는데, 심지어 총괄 그룹은 교수와 실무자 모두가 밤에도 계속 카톡으로 업무지시와 답변이 오가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곳에서 학위를 했다면 정말로 때려치고 나갔을지도.
어쨌거나 내가 있는 그룹은 전체 프로젝트에서 일부만 차지하고 있고, 사실상 큰그림이 나와야해서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학교, 병원, 회사 모두 내가 참여하기로 한 연구내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게 맞으니 일단은 적응해 보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모든 준비과정이 긴급으로 진행되다보니 퇴근은커녕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11월이 되기도 전에 신청해놨던 매일 블로그 글쓰기 챌린지는 결국 정갈한 정신상태에서 쓰지 못하고 자정 직전에 일하다말고 부랴부랴 10~15분만에 휘갈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원래의 기획의도와 나름의 기준을 맞추지 못하고 펑 터지는 결과를 낳았다.
영업일 기준으로 하루, 주말을 껴도 3일도 남지 않은 금요일 밤인 현재에도 카톡에서는 각종 기관의 실무자들이 승인받고 검증하고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 알람도 계속 온다. 그렇다고 알람을 꺼놓자니 내가 해야되는거 놓쳐서 일 진행 안되고있을까봐 5분 대기조 상태이다. 어쨌든 해줄거 다 했다 생각하고 퇴근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간의 수정사항들을 보면 요청사항대로 열심히 그린 그림도 다 날라가있고, 심혈을 기울여 포맷에 맞춰 써준 글도 임의로 고쳐써져있고, 그야말로 사상누각이 따로 없다.
메신저의 효용은 빠른 소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생각에 기반한 빠른 업무소통은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킨다. 전체 그림이 파악된 게 아닌 채로 하달되는 관리자의 지시는 틀릴 때가 많다. 지시가 틀렸는데 그것을 제대로 해내 보았자 돌아오는 피드백은 아 그렇게 하면 안되고 이렇게 해야되네요 다시해오세요 이다. 사실 내가 업무상 연락에는 이메일을 선호하는 이유가, 보내기 전 맞게 썼는지 검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정돈된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연락의 무게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필요 없는 내용은 제거하고 정말 필요한 내용만 전달되어야 업무가 자연스러울 텐데, 학계에 들어온지 10년 가까이 돼가는 동안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초긴급 실시간 카톡 업무지시라는 것을 강제당해 보니 앞으로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의지와 상관없이 업무상 단체톡방에 갇혀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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